본문 바로가기
연기

배우의 무대 블로킹 (Blocking) 원칙과 적용 방법

by ※◇♧‡ 2023. 6. 21.

블로킹(blocking)은 무대에서 배우의 모든 움직임을 가리킨다. 이때의 움직임이란 인물의 등 퇴장, 가로지르기, 앉기, 눕기 등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공간의 변화를 일으키는 Movement, 책 읽기, 볼펜 만지작거리기 등과 같은 Business, 그리고 무대 위 인물의 배치에 해당하는 Placement를 총괄하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배우가 무대에서 지켜야 할 블로킹의 원칙과 그 적용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블로킹은 누가 결정하는가?

블로킹은 글로 되어있는 희곡을 눈앞의 현실로 만드는 과정에서 배우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약속이다. 블로킹의 규칙이 없다면 배우들이 기분대로 아무렇게나 움직여 무대는 질서 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배우의 무대 움직임은 엄격한 규칙하에 미학적, 정서적 잣대로 만들어져야 한다.

- 작가는 극작을 할 때 이미 자신이 창조하는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이 있다. 그것을 해설과 지문을 통하여 배우에게 지시해 놓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이런 지시문이 거의 없다. 따라서 창작자들이 분석, 유추하여 창의적으로 표현할 여지가 많다. 반면 유진 오닐과 같은 작가의 작품은 배우의 행동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지시해 놓아 배우의 연기를 작가가 연출가와 같이 통제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작가들은 자신의 무대 지시문을 수정 없이 반드시 지키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 보편적으로 공연 제작에 있어 블로킹의 책임과 권한은 연출가에게 있다. 작가의 희곡은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 되지만 공연으로 입체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출가의 해석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때 연출가는 작가의 무대 지시문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해석에 따라 자유롭게 블로킹을 창조해 나간다. 주로 해석적(분석적) 연출가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의도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블로킹을 창조하고, 창조적 연출가는 작품을 나름의 해석으로 재창조하여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블로킹을 추구한다. 물론, 이 둘은 성향의 차이일 뿐 예술적 성취의 차이는 아니다.

- 최종적으로는 배우가 스스로 창조하여야 한다. 연출가는 본인의 성향에 따라 사전에 배우의 블로킹을 미리 구상한 후 연습에 임하는 경우와 큰 거점만을 제시한 후 배우들이 자유롭게 블로킹을 창조하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있다. 배우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동선이 보장된 경우 자신의 충동대로 움직일 수 있고, 창의적인 블로킹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전체의 미학적 앙상블을 구현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연출가의 효율적인 조율이 필요하다. 반대로, 연출가가 사전에 블로킹을 구상하여 오는 경우라고 하여도 배우는 반드시 그 블로킹을 자신의 내적 충동과 결합하여 스스로 당위성을 창조하여야 한다. 결국 무대에서 움직이는 것은 배우이므로 미학적으로 아무리 완벽한 그림이라고 해도 배우가 진실되게 움직이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블로킹은 동선이자 감정선이다.

블로킹은 배우의 단순한 움직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밥상을 차리기 위해 무대에 등장했다가 나가는 하녀의 동선 속에도  그 인물만의 정서가 묻어 있어야 한다. 모든 블로킹은 인물의 정서에 따라 결정된다. 다급하거나 화가 났을 때에는 빠르고 강한 직선, 부드럽고 다정한 장면에서는 느리고 유려한 곡선 등 인물은 블로킹에 자신의 정서를 투영한다.

 

블로킹은 잘 의도된 액션의 원칙을 따른다.

무대에서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은 블로킹이 아니다. 모든 움직임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에 따라 행동 방식이 결정된다. 블로킹은 대사와 같이 정확히 시작하여 정확히 끝나는 하나의 액션에 속한다. 하나의 액션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어떤 충동을 일으키고 이 충동이 들숨을 유발하여 이 들숨의 배출과 함께 최종 액션이 발생한다. 블로킹 역시 이 원칙에 따라 발생하고 정지된다. 따라서 무대 위의 움직임은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자유곡선이 아니라 방향, 각도, 속도, 강도 등을 지닌 특정한 선으로 이루어진다.

 

배우의 블로킹은 초점(focus)과 몸 열림(open)의 원칙을 따른다.

극 중 기능상의 블로킹은 작가가 대본에 제시해 두었고, 미학적인 블로킹은 연출가의 해석에 따라 창조되겠지만, 배우는 개개인의 움직임을 스스로 해결하여야 한다. 대대로 내려오는 배우의 블로킹에 관한 규칙들은 수없이 많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대체로 극의 초점 유지와 배우 자신의 몸 열림에 관련된 사항들이 많다.

배우는 자신이 주목받아야 하는 경우 확실하게 초점을 자신에게 가져와야 한다. 말을 하기 전에 일어선다거나,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거나, 가급적 대사를 하는 중에 움직이지 않고, 굳이 움직일 경우에는 다른 배우 뒤로 지나가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초점과 관련된 규칙들이다.

반대로 다른 배우에게 초점이 있을 때에 배우는 절대 자신이 주목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배우의 대사 중에는 움직이지 않고, 꼭 움직여야 할 경우에는 최대한 조심하고, 대사 하는 배우 앞으로는 지나가지 않는다는 규칙 등이 이에 속한다.

배우의 몸 열림에 관련해서는 무대에서 가급적 뒷모습 보이지 않기, 의자에 앉거나 일어설 때 고개 숙이지 않기, 걸음을 걷거나 팔을 뻗을 때에는 전진 방향의 앞발을 먼저 내딛고, 앞쪽 팔을 내밀기 등, 앉기, 서기, 무릎 꿇기, 걷기, 말하기 등에 관한 수도 없이 많은 규칙들이 있다.

이 외에도 상대와의 앙상블을 위한 움직임, 무대 균형을 위한 움직임 등 다양한 경우의 블로킹 법칙이 있는데, 이것들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초점과 몸 열림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상 배우의 무대 블로킹 원칙과 적용 방법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들 중 배우의 관습에 관한 부분은 오늘날 크게 중요시되지 않는 경향도 있지만, 모든 규칙에는 애초에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먼저 이해하고 배우 나름의 원칙으로 무대에서 적용해 나가다 보면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미학적인 블로킹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