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의 압권은 슬픈 연기이다. 감동적인 연기에 집중한 관객은 극 중 인물의 비극에 공감하여 함께 슬퍼하고 같이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카타르시스이며 극장을 찾는 이유이다. 배우 역시 슬픈 연기를 멋지게 해내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자칫 억지로 만들어진 슬픈 연기는 관객의 몰입을 한 순간에 빼앗고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든다. 여기서는 슬픈 연기를 진실하게 하는 방법을 알아보기로 하자.
배우로서의 대본 분석을 해야 한다.
배우로 처음 희곡을 읽을 때는 일반 독자나 관객의 눈으로 작품을 본다. 그리고 관객이 희곡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낄 인상을 정리한다. 이것이 첫인상 정리이다. 첫인상 정리는 연습을 진행하는 동안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희곡을 두 번째 읽을 때부터는 배우로서의 대본 분석을 해야 한다. 배우의 대본 분석은 감정 분석이 아니다. 초목표, 장면의 목표, 대사의 목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액션, 액션을 강화하기 위한 서브텍스트로 이어지는 행동 분석이다. 감정은 연기의 영역이 아니다. 미리 감정을 분석하고 준비하지 말아야 한다.
슬픔을 연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감정은 바람과도 같아서 언제 어떻게 오고 어떻게 갈지 종잡을 수 없다. 배우는 자신이 해야 할 일, 즉 상황에 따른 진실한 행동을 하며 감정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사전에 슬픈 장면이라고 감정 분석을 해 놓은 경우, 행동보다는 감정을 연기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이것은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바람과 같이 감정은 잡는다고 해서 잡아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 잡고 연기한다는 표현은 이미 틀린 말이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불어오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 배우의 진실한 행동이다. 배우가 감정이 불어오도록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시도는 액션을 강화하는 것뿐이다. 연극 <리어왕>에서 코딜리어가 아버지 리어왕의 시신을 보고 울부짖는 장면에서 배우는 반드시 울어야 하지만 울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 단지 배우가 할 수 있는 진실한 행동은 아버지의 거칠어진 얼굴, 아무렇게나 뻗친 흰 수염과 머리카락, 눈가에 흘러내린 눈물자국 등을 진심으로 보고 진심 어린 애도를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틈에 슬픔이 찾아와 연기에 깃들 것이다.
슬픔에 젖지 말아야 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슬픔이 몰려왔다는 느낌이 들면 배우는 희열을 느낀다. 슬픔에 휩싸인 자신의 모습에 심취하여 그 감정에 몸을 맡기고 싶어 진다. 하지만 배우는 슬픔에 젖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슬픔에 젖고 싶은 사람은 없다. 슬픔에 빠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슬퍼하는 모습이란 생각만으로도 이율배반적이다. 진실한 슬픔은 감정이 아니라 흐느낌, 눈물, 호흡곤란 등 신체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런 반응은 쾌감이라기보다는 고통이며 액션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동한다. 따라서 진실하게 행동하는 인물은 이 장애를 억누르고 회피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슬픔이 진실이라면 어떻게든 삐져나오고 터져 나온다. 이것이 배우의 슬픈 연기이고, 관객은 그 모습에 눈물이 터진다.
슬픔은 관객의 몫으로 두어라.
슬픈 상황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슬프다고 자각하지 않는다. 감정은 현재 상황과 심리상태에 대해서 이성적 판단을 거쳐야 규정된다. 기쁨은 "아, 이 상황은 엄청 기분 좋은 일이야.", 분노는 "아, 이 상황은 정말 화나는데..."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슬픔은 "아, 지금 너무 슬프군."하고 규정되지 않는다. 단지 어떤 비극적인 상황을 겪을 뿐이다. 그래서 슬픔은 배우의 감정이 아니다. 슬픔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관객의 몫이다. 배우로서의 대본 분석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상황을 거꾸로 분석한다. 자신의 배역에게 관객의 시점을 부여함으로써 슬퍼지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세상에 스스로 슬퍼지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니 슬픔을 시도하는 연기는 거짓 연기이다. 슬픔은 관객의 몫으로 두면 된다. 그리고 배우는 배역의 진실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상 슬픈 연기하는 방법을 살펴보았다. 결론은 슬픈 연기를 잘하려면 슬픈 연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슬픈 연기를 하지 않는데도 슬픔이 몰려온다면 드디어 슬픈 연기에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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